영국 규제가 쏘아올린 AI 데이터 주권…한국 미디어와 AI 생태계의 갈림길

영국 경쟁시장청(CMA)이 구글의 AI 검색 기능(AI Overviews)에 대해 콘텐츠 발행인들에게 ‘옵트 아웃(Opt-out, 거부권)’ 권한을 보장하도록 강제했습니다. 단순한 한 국가의 규제를 넘어, 거대 테크 기업이 AI 학습에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의 범위와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신호탄입니다. 한국의 미디어 기업, AI 스타트업, 그리고 수억 개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이것은 단순한 해외 뉴스가 아니라, 향후 국내 AI 생태계의 구조를 좌우할 분기점입니다.

한국 미디어 기업들에겐 ‘협상력’…AI 스타트업들에겐 ‘위협’

이번 결정이 한국 시장에 미칠 영향은 극명히 양립합니다. 먼저 국내 언론사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의 입장을 보겠습니다. 네이버가 국내 검색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카카오의 카카오맵과 카카오톡까지 확장하면서 로컬 플랫폼의 영향력은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기업은 자체 AI 모델(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 카카오의 카카오브레인)을 개발하기 위해 웹 콘텐츠를 대규모로 수집하고 있습니다. 만약 영국의 사례처럼 한국에서도 발행인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AI 학습에서 제외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다면, 언론사는 처음으로 ‘데이터 협상 테이블’에 앉을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미 뉴욕타임스는 오픈AI와의 저작권 소송 합의를 통해 콘텐츠 이용료를 받기로 했으며, 이는 전 세계 미디어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내 AI 개발사와 스타트업들의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한국어 학습 데이터는 영어나 중국어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웹 크롤링이 주요 데이터 확보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AI 기업들이 경쟁력 있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개발하려면 고품질의 한국어 데이터가 필수적입니다. 만약 네이버, 다음, 각 언론사 등이 일제히 옵트 아웃 기능을 활성화한다면, 한국 AI의 학습 데이터는 급격히 축소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 스타트업들이 구글, 메타 같은 글로벌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학습 데이터의 양과 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터 접근성이 더욱 제한된다면, 한국형 AI 개발은 ‘데이터 고립’이라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로 클릭’ 검색이 초래한 콘텐츠 생태계 위기

이 논쟁의 근본 원인은 AI 검색의 작동 방식 자체입니다. 구글의 AI Overviews나 네이버의 AI 요약 검색은 사용자가 검색어를 입력하면 관련 웹사이트를 방문하지 않고도 답변을 직접 제시합니다. 즉, 사용자가 원문 사이트에 도달할 필요가 없어지는 ‘제로 클릭 검색(Zero-click Search)’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는 원문 작성자의 광고 수익과 트래픽을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실제로 개미로(Emilos)라는 데이터 분석 기업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AI 검색 요약 기능이 확대되면서 뉴스 사이트의 직접 클릭 트래픽이 20~30% 감소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트래픽 문제가 아니라, 저널리즘의 지속성 자체를 위협합니다. 뉴욕타임스가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배경도 바로 이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축적한 고품질의 저작물이 AI 회사의 학습 데이터로 무단 사용되면서, 그로 인한 광고 수익 손실까지 겹쳤기 때문입니다.

콘텐츠 생태계 지속성 vs. AI 정확성…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할 때

긍정적 관점에서 보면, 이번 규제는 ‘콘텐츠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창작자들이 자신의 저작물이 정당한 보상 없이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양질의 콘텐츠를 계속 생산할 동기부여가 됩니다. 이는 저널리즘뿐 아니라 개인 블로거, 유튜브 크리에이터, 연구자들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더 나아가, 이는 ‘AI를 위한 데이터’가 아닌 ‘사람을 위한 데이터’라는 원칙을 되찾는 첫걸음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우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약 주요 뉴스 사이트, 학술 자료실, 커뮤니티가 모두 옵트 아웃을 선택한다면, AI 모델은 편향되거나 제한된 정보만을 학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뢰도 높은 뉴스 매체의 데이터를 학습하지 못한다면, AI의 사실 검증 능력은 크게 떨어질 것입니다. 또한 한국의 경우 중소 미디어나 지역 언론은 옵트 아웃 기능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대형 포털과 신문사만 데이터를 폐쇄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렇게 되면 AI는 상대적으로 낮은 품질의 정보를 더 많이 학습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이 택해야 할 세 가지 길

한국 IT 업계와 정책 입안자들은 이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첫째, 네이버, 카카오, 구글코리아 등 주요 플랫폼 기업들은 단순한 데이터 크롤링 방식을 버리고 언론사, 콘텐츠 크리에이터와의 ‘정당한 라이선스 계약’ 모델을 구축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오픈AI 합의에서 나온 ‘공정 이용 기금(Fair Use Fund)’처럼, 한국에서도 미디어 기업에 데이터 사용료를 지급하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둘째, 공정거래위원회와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글로벌 규제 추세를 반영한 ‘국내 AI 데이터 이용 가이드라인’을 선제적으로 수립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AI 데이터 수집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기업들이 회색 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셋째,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은 자신의 데이터의 가치를 인식하고, robots.txt 파일 설정이나 이용약관 개정 같은 기술적·법적 수단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결국 앞으로의 AI 시대는 ‘누가 더 많은 데이터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더 가치 있는 데이터와 윤리적인 파트너십을 맺었는가’가 성패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영국 CMA의 이번 결정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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